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자연 상태 그대로가 아니라,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든 각종 시설물만이 아니라 인위적인 각종 제도가 얽혀있는 복합적인
공간입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각자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그 권리와 의무는 자신이 행사하여야 한다는 것도 이런 인위적 제도 중의 하나입니다. 부부나
가족의 구성원 사이에도 각자의 권리나 의무가 있고, 각자 그 권리를 행사하거나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회 제도입니다. 물론 내것-네것 구분
없이 가족 단위로 책임을 지면서 소박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부부나 가족들에게는 낯설기도 할 것입니다. 권리행사나 의무이행을 스스로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자신이 미리 정한 대리인이나 법률에서 정한 대리인이 자기를 대신하게 할 수 있습니다. 법률에서 정한 대리인의 대표적인 예가 아동의 친권자와
법정후견인(아동후견인, 성년후견인, 한정후견인, 특정후견인)입니다.
그런데 19살이 되지 않은 미성년자라고 해서 친권자나 후견인이 아무 제한 없이 아동의 권리를 대신 행사해도 되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UN 아동권리협약상의 아동권리존중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사실 성인입니다. 발달장애, 정신장애, 뇌병변, 치매 등으로 판단능력에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부모나 친족이 그의 권리를 대신 행사해도 되는가? 부모나 친족이 없거나 마땅하지 않다고 제3자가 후견인이 되어 그의 권리를 대신
행사해도 되는가? 의사결정능력에 장애가 있는 성인의 자기결정권이 경시되어도 되는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우리는 자기결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기결정의 결과에 대해서도 자기가 책임을 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실패에 대한 자기 책임은 개인을
인격적으로 더욱 성장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다른 사람의 조언을 얻거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도움받기와
지원하기’를 통해 우리는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유대와 연대를 형성하고 또 강화해 나가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자기결정권의 존중과 연대’라는 날줄과 씨줄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결정권을 존중함으로써 다양성을 보장하고,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다양하지만 전체로서도 조화를 모색해 나간다는 것이지요.
의사결정능력에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부모나 친족, 또는 제3자 후견인의 대행의사결정을 인정하게 되면 ‘자기결정권의 존중과 연대’의 원칙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이들을 배제하게 될 것입니다. ‘도움받기와 지원하기’가 아니라 ‘대신 결정하기’를 통해 ‘자기결정권을 박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후견·신탁 연구센터는 ‘대행의사결정’을 통해 ‘자기결정권을 박탈’ 당할 위험에 처해 있는 고령자·장애인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여러 사회제도의
개선 및 새로운 제도의 도입, 이들의 자기결정권 행사를 지지하고 의사결정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실무활동의 개선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우리
후견·신탁연구센터는 특히 ‘성년후견유형’이나 ‘한정후견유형’을 장애인에게 적용시키는 것에 반대합니다.
후견을 개시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결정권 행사의 제한이기 때문에, 필요한 범위에서(필요성의 원칙) 최소한으로만 이용되어야 한다는 원칙(최후의 수단)을
존중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대신 고령자·장애인 신탁, 사전의료지시서, 사전요양지시서, 지속적 위임계약서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한 의사결정지원이 있어야
하고, 다양한 유형의 권익옹호서비스가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새로운 서비스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행각합니다.
우리 후견·신탁 연구센터는 이와 관련된 종합적인 연구를 하는 기관입니다. 고령자, 장애인만이 아니라 가족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동의 권익옹호를
위한 정책의 산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국후견·신탁연구센터장
교수 제 철 웅